우연한 인식, 사소한 선택 한 번으로 너는 또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 평행우주 또는 윤회처럼 보이는 여러 삶의 모습들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선택할 수 있는 것, 의지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밧줄을 놓거나 놓지 않거나 하는, 그 파장을 확신할 수 없는 그래서 불안을 동반하는 미시적 차원의 지극히 제한된 자유이기도 하다.

노예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현대에 마땅한 권리의식의 발로처럼 보일지 모른다. 도구적 삶의 종언을 위해 시스템에 맞서는 것은 자유의지 현대에 마땅한 귀결로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현재의 나는? 당신은? 때로 비약은 그리고 극단은 상황을 보다 뚜렷하게 전달하는 비유가 된다. 당장의 편리와 사회(타자)에 대한 이기심으로 빚어진 현재의, 과거의 그리고 또 미래의 모습에 말이다.

영화 속 평행우주 또는 윤회의 모든 삶에 침투한 독은(가장 중요한 부분을 갉아먹는 벌레는) 바로 ‘나’이고 ‘당신’이다. ‘현실은’이라는 보편의 거대한 당위로 이루어지고 지탱되는 사회의 모든 폭력과 비상식, 비인도적 조치들, 차별의 근원은 바로 개개인이 한결같이 나 몰라라 책임을 떠넘긴, 입만 열면 꺼내는 ‘현실은’이라는 보편의 조각들이다. 폭력의, 차별의 근원지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코앞의 이익(또는 목숨)을 앞두고 어쩔 수가 없다는 현실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행동 양식이 되어 일상을, 삶을 잠식해 간다. 영화는 당신이 그런 삶 속에 균열이 되어주기를 촉구한다.

내 손자를 위해서 말하는 데, 세상에는 자연적인 서열이 있다네. 그리고 그 서열을 뒤집으려는 자들은 좋게 끝나지 않아. 이 운동은 절대 성공 못 해. 그들과 함께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 가족 모두를 기피할 걸세. 그렇게 침 맞고 폭행당하며 소외된 삶을 살든가, 맞아 죽든가 십자가에 못 박힐걸세. 그런데도 도대체 뭘 위해? 자네가 뭘 하든 무한한 바다속의 물방울 하나보다 못한 일이 될걸세.

바다는 수많은 물방울의 집합이 아닌가요?